후지이 야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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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이 야스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1987년부터 2002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 오릭스 브레이브스,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활약했다. 1989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1990년에는 월간 MVP를 수상하며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2001년에는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와 스카우트로 활동했으며, 2021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1·2군 순회 타격 코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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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이 야스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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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이름 | 후지이 야스오 |
원어 이름 | 藤井 康雄 |
로마자 표기 | Fujii Yasuo |
출생일 | 1962년 7월 7일 |
출생지 |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
신장 | 181cm |
체중 | 81kg |
포지션 | 외야수, 1루수 |
투구 | 우 |
타석 | 좌 |
프로 입단 정보 | |
드래프트 연도 | 1986년 |
드래프트 순위 | 4순위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센슈 고등학교 |
실업 | 프린스 호텔 |
프로 | 한큐 브레이브스 (1987년 ~ 1988년) 오릭스 브레이브스 (1989년 ~ 1992년)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3년 ~ 2002년) |
NPB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
첫 출장 | 1987년 4월 10일 |
마지막 출장 | 2002년 10월 13일 (은퇴 경기) |
통산 타율 | 0.252 |
홈런 | 282개 |
안타 | 1,207개 |
수상 경력 | |
일본 시리즈 우승 | 1회 (1996년) |
올스타 선정 | 1회 (1989년) |
베스트 나인 | 2회 (1989년, 1993년) |
코치 경력 | |
등번호 | 71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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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경력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출신으로, 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하여 프린스 호텔 사회인 야구팀을 거쳐 1986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4순위로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했다. 이후 팀명이 바뀐 오릭스에서 2002년 은퇴할 때까지 16년간 프로 야구 선수로 활약했다.
주로 1루수와 외야수로 뛰었으며, 현역 시절 통산 282개의 홈런을 기록한 강타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만루 홈런 상황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으며[52][56],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 및 일본 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했다[16][23]. 2002년 시즌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했으며[31], 그의 은퇴로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부터 오릭스에 소속됐던 선수는 모두 팀을 떠나게 되었다[33]. 은퇴 후에는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2. 1. 프로 입단 전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만화 《거인의 별》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으며, 당시 포지션은 3루수였다.[2][3] 이 무렵부터 장래에는 프로 야구 선수가 되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고,[4] 같은 좌타자인 오 사다하루를 동경했다.[3] 후쿠야마 시립 다카토리 중학교에서는 투수와 외야수를 겸임했으며, 타구가 우익수 쪽 교실을 넘길 정도의 장타력을 가지고 있었다.[2] 야구 유학으로 센슈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포지션은 변하지 않았고, 장타력을 높이 평가받았지만 변화구에는 약했다.[2]고시엔 대회 출전 경험은 없지만, 지인의 권유로 프린스 호텔에 입사했다. 프로에 입단한 이시게 히로미치의 후임으로 유격수로의 전환이 검토되었으나, 며칠 만에 무산되어 1루수가 되었다.[2] 당시 프린스 호텔은 고교 유력 선수 영입으로 방침을 전환하던 시기였고, 동기로는 나카지마 테루시, 카와무라 카즈아키, 타카야마 이쿠오 등 고시엔에서 주목받아 드래프트 지명이 예상되던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주전 멤버가 되지 못했지만, 이시야마 켄이치 감독이 복귀한 후 그의 지도를 받아 전일본 대표팀의 4번 타자를 맡기도 했다.[5] 또한 20대 초반에 어깨 부상을 당해 반년 정도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어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한다.[6]
1983년부터 4년 연속으로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으며, 1985년부터는 4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1986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는 준준결승까지 진출했으나 NTT 호쿠리쿠에 패했다. 이 대회의 2회전에서는 쿠마가이구미를 상대로 한 경기 2홈런을 기록했다.[7] 당시 팀 동료로는 동기인 나카지마 외에 프로에서도 함께하게 되는 오가와 히로후미 등이 있었다.
사회인 야구 최고 수준의 강한 어깨와 베이스 일주 14.5초의 빠른 발을[2] 높이 평가받아 1986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았다. 도쿄에서 6년간 생활했기 때문에 도쿄 연고 구단을 희망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라는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입단을 결정했다.[8] 담당 스카우트는 미와다 카츠토시였으며, 계약금 4300만엔, 연봉 450만엔(모두 추정치)으로 계약을 맺었다.[9] 전일본 대표팀 동료로 함께 입단한 야마코시 요시히로(86년 2순위), 모토니시 아츠히로(85년 4순위, 다음 해 입단)와 함께 '전일본 트리오'라고 불렸다.
2. 2. 프로 야구 선수 시절
현역 시절 통산 282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지만, 본인은 "어디까지나 히트의 연장선상에 홈런이 있으며, 자신의 스윙을 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비거리가 늘어났다"고 말했다.[30] 실제로 안타 대비 홈런 비율이 매우 높아 통산 IsoP는 0.235에 달했다.[51] 통산 만루 홈런 14개는 나카무라 타케야(22개), 오 사다하루(15개)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한다.[52] 또한 대타 만루 홈런은 통산 4개, 한 시즌 3개(2001년) 모두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56] 선구안도 뛰어나 볼넷이 매우 많았으며, 통산 출루율은 타율보다 .101 높다. 1999년에는 규정 타석 미달이었음에도 78개의 사사구를 얻어내며 출루율 .390을 기록하기도 했다.상대했던 투수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선수로는 속구와 슬라이더가 뛰어났던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포크볼의 낙차가 컸던 노모 히데오를 꼽았다.[16] 프로 입단 초기에는 와타나베 히사노부와 곽태원의 투구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며,[53] 젊은 시절에는 타석에서 눈이 마주치면 웃어 보이는 우시지마 카즈히코를 상대하기 어려워했지만, 투지를 드러내는 오노 카즈요시와 같은 유형의 투수와는 상성이 좋았다고 회상했다.[10] 니시자키 유키히로를 상대로는 통산 3개의 만루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특정 투수 상대 최다 기록이다.[56]
2. 2. 1. 한큐·오릭스 시절
프로 1년째인 1987년 스프링 캠프에서 타격 능력을 인정받아 감독 우에다 도시하루에게 적극적으로 기용되어 77경기에 출전했다.[2] 금속 배트에서 나무 배트로 바뀌면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10] 시즌 후 결혼했고, 우에다 감독으로부터 ‘가늘고 길게, 힘내라’라는 격려를 받고 마음의 여유를 얻었다고 훗날 회상했다.[2]1988년 5월 하순, 부머 웰스가 왼쪽 무릎 부상으로 귀국하자 그를 대신해 1루수를 맡아 타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5월 28일 난카이 호크스전에서는 처음으로 4번 타자로 출전했다.[2] 같은 해 주니어 올스타 게임에서는 결승 홈런을 쳐 MVP와 상금 100만엔을 획득했다.[11] 부머가 복귀한 후에는 주전 우익수가 됐고,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시즌 20홈런을 기록했다.[2]
팀명이 오릭스로 변경된 1989년에는 미노다 고지의 이적으로 개막전부터 주전 우익수 자리를 차지하며[8] 블루 선더 타선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7월에는 생애 첫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여 사이토 마사키를 상대로 2점 홈런을 치는 등 활약하여 우수 선수로 선정됐다.[12][13] 정규 시즌에서는 타율 0.292, 30홈런, 90타점의 성적을 거두며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됐다. 이듬해인 1990년 5월에는 타율 0.363, 6홈런, 18타점의 성적으로 첫 월간 MVP를 수상했고,[14] 개인 최다인 37홈런, 96타점을 기록했다.
1991년 시즌에는 5월 3일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에서 끝내기 2점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프로 선수 시절 기록한 홈런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15] 그러나 5월 수비 연습 도중 펜스에 부딪혀 외상성 목 증후군 진단을 받았고, 이후 왼팔 저림과 목 움직임 제한 증상을 겪었다.[16] 신체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본래의 타격 폼을 잃어 그해 타율이 0.222로 크게 하락했다.[16] 부상 여파로 1992년에는 출장 경기 수가 20경기로 급격히 줄어들었고,[15] 시즌 종료 후 계약 갱신 과정에서 연봉 1,000만 엔이 삭감된 4000만엔(추정)이 됐다.[17]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기간 동안 끈기 있게 치료와 훈련에 전념했으며,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5] 1993년에는 시즌 초반 타율이 1할대에서 2할대 사이로 부진했지만, 5월 18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3홈런 7타점을 기록하며 반등의 계기를 마련했고,[18] 7월에는 타율 0.324, 4홈런, 12타점으로 통산 두 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14] 그해 팀 내 최다인 28홈런, 86타점의 성적으로 통산 두 번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됐고, 퍼시픽 리그 특별 표창으로 노력상을 수상했다.[19] 또한, 11월에 열린 퍼시픽 리그 동서 대항전에서는 결승 3점 홈런을 쳐 대회 MVP를 차지했다.[20] 시즌 종료 후 계약 갱신에서는 연봉 4,000만 엔이 인상된 8000만엔(추정)이 됐다.[21]
오기 아키라가 감독으로 부임한 1994년에는 급성장한 이치로가 우익수를 맡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시바하라 미노루나 카브레라와 함께 우익수 또는 1루수로 기용됐다. 1995년에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가운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며, 우승이 결정된 경기에서 위닝볼을 잡은 순간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한다.[16] 1995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부터 5차전까지 5번 타자 겸 우익수로 선발 출전했다.[22] 1996년에는 규정 타석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3년 만에 20홈런을 기록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맞붙은 1996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을 제외하고 선발 출전하여[23]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97년에는 타율, 홈런, 타점 모두 전년 성적을 밑돌았고, 취득한 FA 권리 행사에 대해 구단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야구 협약 상한선을 넘는 40% (3,000만 엔)가 삭감된 연봉 4800만엔(추정)으로 재계약했다.[24] 1998년에는 타격 코치 아라이 히로마사의 조언에 따라 배트 무게를 약 950g에서 920g으로 줄이고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기는 조정을 통해 헤드 스피드를 높였다고 한다.[25] 이 변화로 비거리가 늘어나 시즌 막판까지 홈런왕 경쟁을 벌여,[25] 최종적으로 선두 나이젤 윌슨에게 3개 뒤진 30홈런을 기록했다. 당시 오기 감독의 작전(일명 '오기 매직')으로 인해 기용 방식이 매일 바뀌었지만, 타순 등이 고정되는 편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고 한다.[53]
2001년 9월 30일 롯데전에서는 고바야시 마사히데를 상대로 퍼시픽 리그 신기록인 통산 14번째 만루 홈런[26]이자,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한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이 해 88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팀 내 일본인 선수 중 가장 많은 15홈런을 쳤다.[27] 그러나 타율은 처음으로 1할대에 머물렀고, 계약 갱신 과정에서 연봉 2,000만 엔이 삭감된 3000만엔(추정)이 됐다.[27]
2002년에는 NPB 현역 최고령 야수 중 한 명이 됐고,[28] 몇 년 전부터 목표로 했던 '40세 현역 속행'을 7월 7일에 달성했다.[29] 신임 감독 이시게 히로노리로부터 타격의 확실성을 높이기 위한 교정을 받았지만,[28] 오히려 타격 폼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30] 결국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결정했고, 당시 "아직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전보다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이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10월 13일 긴테쓰전(고베 그린 스타디움)에서 은퇴 경기가 열렸고,[31] 시구에서는 당시 14세였던 장남과 대결했으며 경기 후 은퇴식이 거행됐다.[32] 그의 은퇴로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부터 오릭스에 소속됐던 선수는 한 명도 남지 않게 됐다.[33]
2. 3. 은퇴 이후
2002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현역 최고령 야수가 되었다.[90] 새로 감독으로 부임한 이시게 히로미치는 확실성을 높이고자 스프링 캠프에서 후지이의 타격을 대대적으로 교정했지만[90], 이것이 오히려 타격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었다.[91] 그 해를 마지막으로 16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으며, 10월 13일 긴테쓰와의 경기에서 은퇴식을 치렀다. 이날 시구식에서는 당시 14세였던 큰아들과 맞대결을 펼치기도 했다.[92] 그의 은퇴로 한큐 시절부터 오릭스에 속해 있던 선수는 더 이상 없게 되었다.[93]은퇴 후 오릭스 2군 타격 코치로 활동하며, 당시 성장이 정체되었던 T-오카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반면, 자신의 지도 방침과 맞지 않아 팀을 떠난 선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지도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코치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신체 사용 유형을 분류하는 히로토 소이치의 '4 스탠스 이론'을 연구했다. 이후 소프트뱅크 등 다른 팀에서 코치로 활동할 때는 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선수별 신체 사용 타입에 맞는 타격 지도를 적용하려 노력했다.
오릭스를 다시 떠난 2019년 말부터는 중·고등학생을 지도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지도력이 더욱 세밀하게 다듬어지는 느낌이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동시에 "이 성과를 다시 한번 프로(NPB)에서 살리고 싶기 때문에, '항상 대기'하는 마음으로 있다. 오릭스 코치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도력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구단이든 상관없다"며 NPB 복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후 2021년 시즌 종료 후 한신 타이거스의 순회 타격 코치로 부임하며 NPB 코치로 복귀했다. 당시 한신 1군 감독이었던 야노 아키히로가 '4 스탠스 이론' 트레이너 자격을 보유하고 있었던 점이 코치 선임 배경 중 하나로 언급된다. 하지만 야노 감독이 2022년 시즌을 끝으로 퇴임할 의사를 미리 밝혔고, 후지이 역시 시즌 종료 후 야노 감독과 함께 한신을 떠났다.
프로에 입단하기 전 6년간 근무했던 프린스 호텔에서는 사회인 야구팀 활동 외에도 호텔 업무를 병행했다. 입사 초기에는 객실 침대 정리를 담당했고, 이후에는 연회나 결혼 피로연 스태프로 일했다. 계열사인 세이부 라이온스의 우승 축하회가 열렸을 때는 주차장에서 차량을 유도하는 역할도 맡았다고 한다.
오릭스 선수 시절에는 팬 서비스에 매우 적극적이어서[56], 팬들이 사인을 요청하면 시간과 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응해주었다고 한다.[57]
마이니치 방송의 마쓰모토 마이코 아나운서는 고베시에서 살던 초등학생 시절, 당시 오릭스의 간판 선수였던 후지이의 팬클럽 회원이었다. 마쓰모토는 "후지이의 외모와 홈런 궤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고 밝혔으며, 마쓰모토의 가족이 후지이의 자택 근처에 살았던 인연으로 당시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한다. 후쿠야마시의 본가에서는 부모님이 가라오케 찻집을 운영하고 있다.[58]
3. 지도자 경력
2002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92]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오릭스 버펄로스 2군 팀인 서패스 고베의 타격 코치를 맡았다. 이때 오기 아키라 전 감독이 사용했던 등번호 72번을 달고 싶다고 희망하여 착용했다.[94] 2007년에는 잠시 구단 편성부로 자리를 옮겼다가,[94] 2009년에 다시 2군 타격 코치로 복귀했다. 복귀 후에는 T-오카다를 1대 1로 지도하여 노스트라이드 타법을 익히게 했고, T-오카다는 그해 웨스턴 리그에서 2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다음 시즌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95]
2010년에는 편성부에서 스카우트를 담당했고,[96] 2011년부터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1군 타격 코치로 부임했다.[96]
오릭스 2군 타격 코치 시절, T-오카다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자신의 지도 방식과 맞지 않아 팀을 떠난 선수도 있었다. 이에 대해 고민하고 반성하며 코치직을 떠난 후 '4 스탠스 이론'을 연구했다. 소프트뱅크 코치 부임 이후에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선수 유형에 맞는 타격 지도를 하고 있다.
2019년 말 오릭스를 떠난 후에는 중·고등학생을 지도하며 지도력을 다듬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NPB 무대에 복귀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며, "항상 준비되어 있다. 오릭스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도력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구단이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2021년 시즌 종료 후, 한신 타이거스의 순회 타격 코치로 NPB에 복귀했다. 당시 한신 1군 감독이었던 야노 아키히로 역시 '4 스탠스 이론'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야노 감독이 2022 시즌 종료 후 퇴임을 예고하면서, 후지이도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한신을 떠났다.
4. 플레이 스타일
현역 시절 통산 282개의 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지만, 본인은 홈런을 어디까지나 안타의 연장선으로 생각했으며, 자신의 스윙을 제대로 하면 자연스럽게 비거리가 늘어난다고 말했다.[91][30] 실제로 안타 수 대비 홈런의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통산 IsoP는 0.235), 이는 그의 타격 스타일을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였다.[97][51]
통산 만루 홈런은 14개로, 나카무라 타케야(22개)와 오 사다하루(15개)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한다.[100][52] 특히 대타로 기록한 만루 홈런은 통산 4개, 2001년 한 시즌에 기록한 3개 모두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100][56]
선구안도 뛰어나 볼넷을 매우 많이 얻어냈다. 1999년에는 규정 타석에 미달했음에도 78개의 사사구를 기록하며 출루율 .390을 기록하기도 했다. 통산 출루율은 통산 타율보다 .101이나 높다.
상대했던 투수 중 가장 뛰어나다고 느낀 선수로는 속구와 슬라이더의 예리함이 뛰어났던 마쓰자카 다이스케, 그리고 포크볼이 마치 한번 솟구쳤다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노모 히데오를 꼽았다.[77][16] 프로 입단 직후에는 와타나베 히사노부나 곽태원의 투구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98][53] 젊은 시절에는 타석에서 눈이 마주치면 웃는 인상을 보이던 우시지마 카즈히코를 상대하기 어려워했지만, 반대로 투지를 드러내는 오노 가즈요시와 같은 스타일의 투수와는 궁합이 잘 맞았다고 회상했다.[71][10] 니시자키 유키히로를 상대로는 개인 최다인 3개의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100][56]
5. 에피소드
- ‘'''미스터 블루웨이브'''’(ミスター・ブルーウェーブ일본어)[100], ‘'''야스오 상'''’(ヤスオさん일본어)[99]이라는 별명으로 친숙하다. 팬 서비스에 열심이었으며[100][56], 팬이 사인을 요청하면 시간이나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응해주었다고 한다.[101][57]
- 후쿠야마 시내에 있는 본가는 가라오케 찻집을 운영하고 있다.[102][58] 후지이 본인도 "네모토 카나메 (스타더스트 리뷰의 보컬)를 목표로!"라고 할 정도의 미성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60] 친구이자 프로듀서인 오자키 가즈유키의 추천으로 1999년에 '…요코'99' 등 3곡이 수록된 CD 앨범을 블루스타 레코드에서 발매했다.[103][59] 이 CD에는 당시 팀 동료였던 오시마 코이치와 타니 요시토모가 코러스로 참여했다.[103][59] '…요코'99'는 오자키가 속했던 그룹 '오자키 카즈유키&코스탈 시티'가 1985년 제16회 세계 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곡 '…요코'의 커버 버전이다.[60] 후지이는 프린스 호텔 근무 시절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이 세계 가요제를 관람했으며,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그린 스타디움 고베의 오로라 비전에 나온 고베 신문 CM에 오자키의 솔로 곡이 사용된 것을 계기로 교류를 시작했다.[60]
- 프로 입단 전 6년간 근무했던 프린스 호텔에서는 사회인 야구 오프 시즌을 중심으로 호텔 업무에도 종사했다. 입사 초기에는 객실 침대 정리를 했고, 이후에는 연회나 결혼 피로연 스태프를 맡았다. 관련 회사인 세이부 라이온스의 우승 축하회가 열렸을 때는 주차 요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 마이니치 방송 아나운서 마쓰모토 마이코는 고베 시내에서 살던 초등학생 시절, 당시 오릭스의 간판 선수였던 후지이의 팬클럽에 가입했었다. 마쓰모토는 "후지이의 외모와 홈런 궤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고 밝혔으며, 가족들이 후지이의 자택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당시부터 서로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 1995년 1월 17일 한신·아와지 대지진 발생 당시, 후지이는 오사카 시내에서 열린 고교 야구부 OB 모임에 참석했다가 고베의 자택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한신 고속 3호 고베선의 쓰키미야마 출입구 부근에서 차를 운전하던 오전 5시 46분에 지진을 겪었다. 본인은 무사했고 자택이나 가족에게 큰 피해는 없었지만, 정전과 단수를 겪어 춘계 캠프가 열리는 미야코지마로 떠나기 전까지 가족과 함께 본가로 피난해야 했다. 후지이는 훗날 "고베선을 통과하는 것이 10분만 늦었더라면 후카에 출입구 부근의 고가도로 붕괴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61]
6. 수상 및 기록
현역 시절 통산 282개의 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다.[30] 그는 홈런을 안타의 연장선으로 보았으며, 자신의 스윙을 하면 자연스럽게 비거리가 늘어난다고 생각했다.[30] 실제로 안타 대비 홈런 비율이 매우 높았으며(통산 IsoP 0.235),[51] 특히 만루 홈런에 강한 면모를 보여 관련 기록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52][56] 1993년 11월에 열린 퍼시픽 리그 동서 대항에서는 결승 3점 홈런을 때려내며 대회 MVP를 차지하기도 했다.[81] 또한 뛰어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높은 출루율을 기록했다.
6. 1. 수상
- 베스트 나인: 2회 (외야수 부문: 1989년, 1993년)
- 주니어 올스타 게임MVP: 1회 (1988년)
- 월간 MVP: 2회 (1990년 5월, 1993년 7월)
- 퍼시픽 리그 특별 표창 (노력상: 1993년)
6. 2. 주요 기록
- '''첫 출장''' : 1987년 4월 10일, 대 난카이 호크스 1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회말에 유미오카 게이지로의 대타로서 출장
- '''첫 타석·첫 안타''' : 상동, 9회말에 이노우에 유지로부터 2루타
- '''첫 타점''' : 1987년 4월 24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1차전(고라쿠엔 구장), 7회초에 후지타 히로마사의 대타로서 출장, 시바타 야스미쓰로부터 적시 2루타
- '''첫 선발 출장''' : 1987년 5월 21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6차전(고라쿠엔 구장), 2번·좌익수로서 선발 출장
- '''첫 홈런''' : 1987년 9월 29일, 대 난카이 호크스 22차전(오사카 구장), 7회초에 야마우치 다카노리로부터 솔로 홈런
- '''통산 100홈런''' : 1991년 6월 28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12차전(후지이데라 구장), 9회초에 다카야나기 이즈미로부터 3점 홈런 ※역대 166번째
- '''통산 150홈런''' : 1994년 8월 9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21차전(가가와 현영 야구장), 5회초에 이마제키 마사루로부터 솔로 홈런 ※역대 99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96년 7월 10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4차전(후쿠오카 돔), 7회초에 오가와 히로후미의 대타로서 출장 ※역대 330번째
- '''통산 200홈런''' : 1997년 9월 17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26차전(도쿄 돔), 1회초에 이마제키 마사루로부터 선제 3점 홈런 ※역대 68번째
- '''통산 1000안타''' : 1998년 9월 20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26차전(오사카 돔), 1회초에 고이케 히데오로부터 우익 방향에 적시 2루타 ※역대 191번째
- '''통산 1000삼진''' : 1999년 9월 9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24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 8회말에 라파엘 오렐라노로부터 ※역대 25번째
- '''통산 250홈런''' : 2000년 4월 7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차전(세이부 돔), 2회초에 마쓰자카 다이스케로부터 우월 선제 솔로 홈런 ※역대 38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 2000년 10월 16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27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 7번·지명타자로서 선발 출장 ※역대 131번째
- '''올스타전 출장''' : 1회(1989년)
- '''만루 홈런 기록''' : 통산 만루 홈런 14개는 나카무라 타케야(22개), 오 사다하루(15개)에 이어 역대 3위 기록이다. 은퇴 시점인 2002년에는 오 사다하루에 이어 2위였다.[52] 대타 만루 홈런은 통산 4개, 시즌 3개(2001년)로 모두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56] 특히 2001년 9월 30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는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역대 7번째).[104]
- '''높은 홈런 비율''' : 현역 통산 282홈런을 기록했으며, 안타에 대한 홈런 비율이 매우 높았다(통산 IsoP 0.235).[30][51] 본인은 "어디까지나 히트의 연장선상에 홈런이 있으며, 자신의 스윙을 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비거리가 늘어났다"고 말했다.[30]
- '''뛰어난 선구안''' : 볼넷이 매우 많았으며, 특히 1999년에는 규정 타석 미만이었지만 사사구 78개를 기록하며 출루율 .390을 기록했다. 통산 출루율은 타율보다 .101 높다.
=== 수상 및 주요 경력 ===
- 베스트 나인: 2회 (외야수 부문: 1989년, 1993년)
- 주니어 올스타 게임 MVP: 1회 (1988년)[72]
- 월간 MVP: 2회 (1990년 5월, 1993년 7월)[75]
- 퍼시픽 리그 특별 표창 (노력상: 1993년)[80]
=== 등번호 ===
- '''38''' (1987년 ~ 1988년)
- '''10''' (1989년 ~ 1992년)
- '''8''' (1993년 ~ 2002년)
- '''72''' (2003년 ~ 2006년, 2009년) - 오릭스 버펄로스 코치
- '''71''' (2011년 ~ 2017년)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2018년 ~ 2019년) - 오릭스 버펄로스 코치
- '''81''' (2021년) - 간사이 소카 고등학교 감독, (2022년 ~ ) - 한신 타이거스 코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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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球浪漫 にんげんドキュメント 50回 藤井康雄[オリックス] 浮浪雲のように。 『細く長く、頑張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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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の人生で一五本目の満塁本塁打めざ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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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SKETCH 6回 この人のテーマは無限の可能性に挑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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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藤井康雄コーチが一軍打撃コーチに異動 北川博敏コーチがコロナで離脱のための措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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